0. 목차
1. 어디에 살았나?
2. 시작하기에 앞서
3. WalkScore 1점의 도시
4. 통근시간에 숨겨진 알파
5. 자동차를 위한 도시
(번외) 테슬라를 위한 도시
6. The American 15-min City?
(번외) 사이니지가 없지만 괜찮아
1. 어디에 살았나?
미국 조지아주 Gwinnett County의 Suwanee라는 작은 도시
2021년 인구는 약 2.2만 명, 면적은 28.4 km2, 인구밀도는 서울의 1/20 정도
서울시 구 평균 면적이 24.2 km2이고, 행정동 평균 인구가 2.2만 명 정도이니, 서울시 구 보다 조금 넓은 면적에 행정동 하나의 인구가 살고 있는 저밀도 도시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움
작은 도시이지만 1990년 인구가 약 2,400명에 불과했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 중인 도시. 새로운 하우스와 어파트먼트 단지가 끊임없이 건설되고 있음
전체 인구 중 약 20%가 아시아인이고, 그 중 한인 비중이 가장 높은 것으로 추정됨(조지아주는 미국 50개 주 중 third language가 Korean인 2개 주 중 하나. 당연히 모든 주의 first and second language는 영어와 스페인어이기 때문에 세 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언어로 그 지역의 인종 구성을 추정할 수 있음)
서쪽으로 바로 인접하고 있는 도시는 약 26.6km2 면적에 3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 Duluth이며, 역시 전체 인구의 10% 정도가 한인일 정도로 Korean 밀집 지역임
Suwanee와 Duluth는 동일 생활권으로 볼 수 있으며, 두 지역 모두 백인, 히스패닉, 흑인, 아시아인의 비중이 비교적 고른 특성을 보임
이 두 지역은 애틀란타 메트로폴리탄 권역으로 볼 수 있으나, 실제로는 메트로나 기타 대중교통으로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음. 따라서 출퇴근을 제외하면 동일 생활권이라고 보기는 어려움. 차로는 막히지 않으면 30분, 막히면 1시간 거리
2. 시작하기에 앞서
미국 교외도시가 모두 다 똑같은 것은 아닐 것이므로 아래의 글은 위와 같은 특정한 공간에 한정되어 나타나는 특징들일 수 있다.
또한, 아래의 내용은 미국 교외도시에서 살면서 느낀 점을 정리한 가벼운 감상문이지, 전문적인 서적이나 논문을 참고하고 쓴 글이 아니다. Street view와 인구, 면적 정도만 구글 검색을 활용했으며, 그 어떠한 다른 자료도 참고하지 않았다.
3. WalkScore 1점의 도시
미국 민간 회사에서 일반인들의 주거지(정확히는 아파트 단지) 선택에 도움을 주기 위해 개발한 WalkScore라는 지표가 있다. 초기 버전을 기준으로 단순하게 설명하면, 특정 지점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시설이 많으면 점수가 높아지고, 그렇지 않으면 점수가 낮아지는 개념이다(최근 버전은 조금 더 복잡해졌다). 0에서 100점 사이로 측정이 되는데, 서울시 대부분의 영역은 100점으로 표시가 되고 사막 한 가운데에선 당연히 0점으로 표시가 될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링크를 참고 - https://www.walkscore.com/)
내가 살고 있는 Subdivision의 WalkScore는 1점이다 ㅎㅎㅎ 개인적으로 1점은 처음 보는 점수였는데, 대체 어떤 포인트가 0점이 아닌 1점을 만들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사실 Suwanee 전체가 1점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Suwanee에 있는 하우스 단지의 대부분은 내가 사는 단지와 유사한 점수로 평가가 될 것이며, 이 하우스 단지라는 것이 미국 교외도시의 Dominant한 주거 유형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즉, 다른 곳이라고 해서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다는거.
우리 Subdivision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넓은 면적에 하우스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다행히 Suburban Nation 같은 책들에서 비판하는 획일적 디자인의 반복적인 건물 배치는 아니어서 경관적으로는 큰 문제가 별로 없다(오히려 한국보다 훨씬 양호하다). 하지만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 단 한 곳도 없는 것은 한국적인 도시에 익숙한 이들에게 제법 낯선 환경임에 틀림 없다. 우리 Subdivision의 유일한 비주거용 건물은 야외 수영장에 딸린 클럽 하우스인데(사실 이 건물의 기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곳마저도 걸어서 갈만한 거리 내에 있지는 않다. 직선거리는 735m로 그래도 보행권 내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네트워크 거리로는 무려 2.1km 걸어서 30분 거리이다. 초등학교도 직선거리는 1.1km인데 네트워크 거리로는 3.2km로 46분 거리이다. 우리나라 도시의 직선거리 대 네트워크 거리 비가 대략 1.6배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얼마나 street connectivity가 떨어지는지 알 수 있다. 가장 가까운 상업시설도 걸어서 35분 정도이며, 병원 등의 사무실 단지(우리나라와는 좀 다르다)는 20분 정도이다. 당연히 이 모든 시설을 걸어서 방문하는 경우는 없다.
이렇게 보행자들에게 불편한 도시가 차를 타면 완벽해진다고?
4. 통근시간에 숨겨진 알파
한국과 미국의 가구통행실태조사 자료를 비교해보면, 평균 통근거리는 미국이 훨씬 긴 반면 평균 통근시간은 한국이 훨씬 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통상 통근거리와 통근시간은 비례하는데 교통상황이 다른 국가 간의 비교에서는 이러한 원칙이 잘 맞지 않는 것이다.
한국의 통근시간이 OECD 국가 중에서도 매우 긴 편이라는 사실은 미디어를 통해서도 여러 차례 보도된 바 있을 정도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아마 많은 이들은 한국의 심각한 교통정체를 주 원인으로 생각할 것이다. 조금 더 생각할 수 있는 분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대중교통수송 분담률이 일정 부분 기여했음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평균속도가 자가용에 비해 느리기 때문에).
한국에 있을 때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미국에 살다 보니 한 가지 원인이 더 두드러지게 피부로 느껴진다. 바로 건물과 주차장에서 소비하는 시간의 차이다. 인구밀도가 높은 한국은 건물이 수직적으로 발달되어 있다. 그래서 집 문을 열고 차를 탈 때까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 등이 추가로 든다. 차를 타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주차장 역시 한국은 수직적으로 미국은 수평적으로 발달되어 있다. 때문에 차를 타고 건물을 빠져나가는데 까지도 시간이 소비된다. 출퇴근 시간을 기준으로 하면 공도에 들어서는 데까지 5분까지도 걸릴 수 있다. 이 시간은 도착하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딘가에 주차할 공간을 찾아 헤매는 일이 잦고, 그렇게 해서 찾은 자리가 건물 출입구와 가까운 곳일 확률은 지극히 낮다. 건물에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 사무실 내 자리에 앉는데 까지 걸리는 시간 역시 만만치 않다.
미국의 주 주거양식인 하우스에서는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거실에서 문을 열면 가라지에 차가 주차되어 있다. 가라지 문을 열고 출발하기 까지 아무리 길게 잡아도 1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공도에 진입하기 까지 단 1분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통근 목적지가 도심인 경우라면 전혀 양상이 다를 것이지만, 여기서는 교외지역을 전제로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다.). 다음 사진들을 보자. 내가 사는 지역에 있는 사무실 건물의 모습이다. 도로변에서 직접 진출입을 하거나 한 켜 정도 들어가면 바로 건물로 진입할 수 있다. 건물 이용자에 비해 주차장의 면적이 넓기 때문에 언제나 건물 바로 앞에 주차 공간이 비어있다. 주차를 하고 건물 문을 열고 내 사무실 책상에 앉는데까지 1분이면 족하다. (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기 위해서는 도로 위에서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위험한 곳이라 차를 세울 수 없었다. 아래 사진들은 모두 구글 스트리트 뷰에서 가져온 것들인데 만족스럽진 않다.)
가구통행실태조사와 같은 통행 조사에서 사람들은 이와 같은 door-to-door 시간을 기준으로 이동 시간을 답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경우 이처럼 숨겨진 시간의 차이를 절대 무시할 수 없다. 한국의 고밀 주거지역에서 고밀 업무지역으로 출근할 때와, 미국의 저밀 주거지역에서 저밀 업무지역으로 출근할 때의 차이는 너무도 크다. 한국에서 출발지와 도착지의 건물 내부와 주차장에서 소비되는 10분이면, 미국 교외도시에서는 10km는 이동할 수 있다. 서울에서는 차로 30분은 가야 하는 거리다.
미국 교외도시의 하우스와 가라지, 작은 건물과 넓은 주차장,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도로 용량은 자동차를 그 무엇보다 매력적인 이동 수단으로 만들어 준다. 더 먼 거리도 더 짧은 시간 내에 도달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다 난 학부 졸업논문을 쓸 때부터 지금까지 보행을 공부하고 있다. 그래도 거부할 수 없는 이 편리함은 어쩔 수 없는거 같다. 물론 내가 사는 이곳은 보행환경 측면에서도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오늘 글의 주제와는 거리가 있어 다루지 않겠다. 뻔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5. 자동차를 위한 도시
3번과 4번을 요약하면, 가까운 곳에 걸어갈 곳은 없지만, 차를 타기에는 최적화된 환경이 바로 미국 교외도시임을 알 수 있다. 즉, 보행자를 위한 도시이기보다는 명백히 자동차를 위한 도시인 것이다. 이미 교과서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주로 부정적인 측면으로) 살면서 직접 보고 경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배움이었다.
자동차를 위한 도시에서 관찰한 몇 가지 현상들을 좀 더 나열해 보자면:
1년 동안 횡단보도에서 신호 대기 중인 사람보다 미드 블록에서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을 압도적으로 많이 봤다. 내 기억으로는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을 본 것이 채 10번이 되질 않는 것 같다. 1년 동안 말이다 ㅎㅎ 이게 운전자 입장에서는 참 편리하면서도 위험한 것인데, 보행자가 전혀 없기 때문에 보행 신호와 무관하게 언제든 우회전을 한다. 한국에서의 습관이 남아 있어 주의를 매우 기울이며 우회전을 하는 편이지만, 이곳 생활이 계속되면 나도 모르게 이런 '당연한' 습관이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이에 반해 그 큰 도로에서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들은 종종 볼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횡단보도가 촘촘히 배치될리 만무하니 intersection까지 걷지 못하고 아무 곳에서나 무단횡단을 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나 미드블록에서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이나 백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90% 이상 히스패닉이나 블랙이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짐 가방 같은 것을 들고 있고 유독 아이와 함께 장바구니를 들고 있는 여성들이 많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두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통근시간 단축의 이점도 다 차를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인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차가 없는 사람들의 통근시간(혹은 통행시간)은 압도적으로 길어진다. 대중교통 시스템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에선 차가 없으면 하루에 한 가지 일밖에 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대중교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데, 버스정류장이 거의 우리나라 지방도시의 고속버스 터미널 급의 위계를 가진 시설처럼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1년 살면서 운행 중인 버스를 본 횟수는 5번이 채 되지 않는 것 같다. 운전을 하다 버스를 마주하게 되면 아이와 함께 굉장히 놀라운 경험을 한 듯 환호할 정도다.
얼마 전 이곳에 버스 노선을 확충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런데 주민들 커뮤니티에선 반대하는 여론이 압도적이다. 버스가 생기면 도심의 노숙자들이 이곳까지 들어오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Davis에 살 때 집 주변에 자전거도로가 생기면 집 값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위에서 언급한 ‘드문’ 보행자들의 집에도 분명 차가 있을 것이다. 차가 한 대도 없는 가구는 이런 곳에서 애초에 살 수가 없다. 이곳은 가구당 1대가 아니라 성인 1명당 한 대가 있어야 하는 곳인데, 모든 가구가 이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이곳에서는 고등학생만 되어도 차를 몰고 다니는데, 이 정도까지 내려가면 소득에 따른 생활 패턴(모빌리티)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된다.
여기까지 읽어 내려온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미 너무도 잘 알려진 뻔하디뻔한 이야기들뿐이니 말이다. 많은 도시 교과서들의 관점이 그러하듯 나 역시 지금껏 부정적인 스탠스로 미국 교외도시를 조망해왔다(평소에도, 그리고 이 글에서도).
하지만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이 모든 것들을 직접 경험하고 나니 교과서 속의 주장과 현실은 괴리가 있다.
(번외) 테슬라를 위한 도시
나는 테슬라의 기술력과 성장 가능성을 항상 평가 절하해 왔는데, 미국에 와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우선 이렇게나 테슬라가 많이 팔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정말 많다. 처음엔 우리가 현대차를 타듯 미국에서도 자국 브랜드를 선호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하우스와 가라지, 이 두 가지가 테슬라의 성장을 견인하는 원동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기 집 가라지에 충전 설비를 두고 충전하는 것과 매번 충전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 헤매거나 충전 설비를 직접 들고 다니는 것이 같을 수 있겠나?
6. The American 15-min City?
아이러니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미국의 교외도시가 요즘 유행하는 15분 도시 개념을 완성할 수 있는 유일한 환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다시 말하지만 학부 4학년 이후 나는 줄곧 보행을 연구해 왔다!?)물론 모레노 교수의 이론과 이에 대한 뉴어바니스트의 해석에 따라 15분 도시에서의 ‘15분’은 반드시 보행과 자전거가 기준이 되어야 함을 잘 알고 있다(심지어 스쿠터나 미국 vacation home community에서 볼 수 있는 골프 카트마저도 이 이론에서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자동차 중심의 미국 교외도시가 15분 도시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지금부터 내 망상의 근거(?)들을 설명해보겠다.
보행과 자전거 중심의 15분 도시는 불가능한가?
미국 교외도시가 15분 도시의 ‘유일한’ 가능성이라는 것은 곧 다른 곳에서는 15분 도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 나는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보행과 자전거만으로 15분 도시 이념이 실현될 수 있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모레노 교수의 이론과 이에 대한 뉴어바니스트의 해석에서 명확히 하고 있는 또 다른 원칙 하나는 15분 '마을'이나 '생활권'이 아니라 반드시 15분 ‘도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15분 도시의 기본 개념에 대해서는 수업 시간에서나 다룰 내용이니 여기서는 패스하도록 하자). 즉, ‘보행이나 자전거’로 ‘15분’ 내에 필수 도시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성능’과 ‘규모’를 모두 갖춘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물리적으로’ 실현가능하지 않다. 그들이 생각하는 도시가 대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 상식에서는 그렇다. 가끔 정량적으로 증명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 이내 시도조차 해볼 가치가 없다는 생각에 포기할 정도로, 직관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우리나라 대도시권에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제발 제게 설명을 좀 해주셨으면 한다).
그래, 그들이 이야기하는 개념이 15분 반경 하나짜리 도시가 아님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15분 반경의 여러 커뮤니티가 모여서 큰 도시를 이루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어차피 15분 내에 원하는 시설과 서비스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지? 인구밀도 16,000명/km2의 서울에서도 불가능한데, 그것이 지방도시에서 가능할리가?
그렇다면 미국 교외도시에서는 15분 도시가 가능하다는 것인가?
아니다 이곳에서 그들이 이야기하는 보행과 자전거 중심의 15분 도시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하지만 기준이 되는 통행수단을 보행과 자전거에서 자동차로 바꾸고 나면 가능성은 충분해진다. 15분 내에 대부분의 도시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단일한 공간단위를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어떻게 만드냐고?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미 이곳은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이곳에서 걸어서 15분 내에 도달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차를 타고 5분 내에 갈 수 있는 곳도 많지 않다. 그런데 재미나게도 그 시간의 폭을 15분으로 늘리면 못 가는 곳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도달할 수 있는 시설의 유형과 수가 대폭 증가한다. 15분 내에 기초 생활시설(작은 사무실, 몰, 수많은 유형의 대형 마트, 병원, 식당, 공공도서관 등등)은 물론이고 백화점, 칼리지, 아레나, 영화관, 비즈니스 호텔, 시청과 같은 비교적 위계가 높은 시설도 접근가능하다. 규정 속도 평균 50mile 정도의 환경에서 건물과 주차장에서 낭비되는 시간 없이 차로 이동하면 15분 내에 15~20km 정도는 이동할 수 있다. 이 정도의 공간 규모면 충분히 “도시다운” 도시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이 15분 도시가 아니면 무엇인가? 거꾸로 보행이나 자전거로 어느 곳에서나 15분 내에 백화점, 칼리지, 아레나, 시청에 접근할 수 있는 도시를 우리 상황에서 만들 수 있는가? 여러 가지 조건들을 바꾸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15분 '자동차' 도시가 가능한 이유는?
물론 미국 교외도시 모든 곳이 내가 사는 곳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15분 '자동차' 도시가 가능한 것은 인구 대비 서비스(공공, 상업, 업무 모두 포함) 밀도가 높기 때문인데 교과서적으로만 보면 주거적인 성격이 지배적인 교외도시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이곳에 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이, “어떻게 이렇게 적은 인구가 이렇게나 많은 상업시설을 지탱할 수 있을까?”였다. 우리나라 자영업이 많다 많다 하지만, 이곳만큼 상업시설이 많은지는 잘 모르겠다(물론 정확히 말하면 여기는 자영업보다 기업형 상업시설이 많지만 다 포함해서 비교하면 말이다). 이는 미국인들의 소비력이 월등히 높다는 것을 의미하며, 살아보니 정말 그런 것 같다. 이곳에 사는 한인 분들은 높은 상업시설 밀도가 주민 구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이곳은 유난히 한국 주재원 가족들이 많이 사는데 그들의 소비력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대체로 집, 차, 보험료, 유틸리티 등 생활에 필요한 큰 비용은 모두 실비로 지원받고, 월급에 해외체제 수당까지 달러로 받는데, 주재원 본인을 제외한 가족들은 이곳에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다 보니 소비생활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그래서 한인 주부들이 좋아하는 시설들이 다른 도시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통계로 확인한 바는 없지만 영향이 없을 것 같지는 않다. 물론 5%도 안 될 것으로 보이는 인구가 도시 전체의 소비력을 얼마나 증진시키겠냐만은.
결국 여유 있는 도로 용량과 자동차 중심의 도로교통 시스템, 자동차 친화적인 주거환경(하우스와 가라지), 인구 대비 높은 소비력이 갖춰진 곳에서 15분 ‘자동차’ 도시는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 모든 조건을 갖춘 곳이 미국의 교외도시 외에 또 있는지 잘 모르겠다(미국 교외도시의 성격을 지나치게 단순화/일반화하고 있다는 것 잘 알고 있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자. 이건 그냥 감상문이지 논문이 아니다.)
“걸어가면 좋고, 차를 타면 나쁜 것인가?” 15분이라는 시간에 숨겨진 의미
결국 내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The American 15-min City’는 보행이나 자전거가 아닌 차에 의한 도시를 뜻한다. 가든시티 개념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소위 The ‘American’ Garden City 개념으로 변형되었듯, 15분 도시 역시 대서양을 건너와 미국화된 것인가? (사실 이와 같은 교외도시의 모습은 15분 도시 개념이 유행하기 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므로, 그 전신을 15분 도시가 아닌 가든시티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긴 하다) 그리고 가든시티가 미국화되어 많은 부작용을 초래하였듯, 15분 자동차 도시도 (만약 그런 개념이 실존한다면) 우리 도시계획가들이 해결해야 할 도시 ‘문제’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걸어가면 좋고, 차를 타면 나쁜 것인가?” 이 글에서만큼은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라고 답하고 싶지만, 사실 그리 간단하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긴 하다. 차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는 비단 “걷지 않음” 그 자체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요 문제는 완전 또 다른 세계이므로 또 내맘대로 패스~)
그런데 차를 타는 시간을 15분 이내로 한정하여 생각해보면 어떨까? 몇 년 전 유행했던 몽고메리 기자의 Happy City라는 책이 있다. 그 책에 지금 나를 조지아텍에 초청해주신 Patricia Mokhtarian 교수님의 인터뷰 내용이 담겨 있는데, (지금 기억나는)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사람은 ‘종종’ 통근을 하지 않을 때보다 통근을 할 때 더 행복감을 느낀다. 인간에게는 과거 사냥에 나가 성공을 한 후 영웅적으로 귀환하며 성취감을 느끼는 남자의 DNA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느낌은 이러하다). 그런데 누구나 알고 있듯 너무 긴 시간을 차에 갇혀있으면 스트레스는 상승하고 행복감은 떨어진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경우에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인가? 목타리안 교수는 그 임계점을 15분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15분까지는 행복감(만족도 등의 복합적인 개념을 의미)이 점차 증가하다, 15분이 넘어가면서부터 스트레스가 더 커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 연구결과가 차량 중심의 15분 도시가 보행이나 자전거 중심 도시보다 바람직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 “15분”이라는 시간이 “기꺼이 운전할만한(drivable)” 시간 범위 내에 있음을 알려주는 결과는 되지 않을까 싶다. 기꺼이 걸을만한 거리(walkable)의 개념처럼 말이다. 이것만 되어도 차가 야기할 많은 문제 중 몇 가지 걱정 정도는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15분 자동차 운전은 5분 걷기처럼, 인간에게 그렇게 부담이 되는 거리는 아니다. 적어도 1차적으로는 말이다.
(번외) 사이니지가 없지만 괜찮아
아래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 교외도시의 상업, 업무용 건축물에는 간판이 없거나 아주 작은 경우가 많다. 이는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 대도시의 도심과도 다른 특성이다. 문화의 차이? 건축 혹은 옥외광고물 규제? 미적 수준의 차이?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수 있겠지만 핵심적인 차이는 보행자의 유무에 있다. 보행자가 있다고 해서 꼭 사이니지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특히 요즘 같은 시대에) 보행자가 전혀 없는 곳에서 사이니지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백화점에서 옷을 고르듯 간판을 보고 목적지를 정할 수 있는 곳이 애초에 아니기 때문이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미리 상호와 주소를 알고 차를 타고 (어쩌면 네비게이션을 이용해서) 찾아가는 곳일 뿐이다. 한국에서도 인터넷과 온라인 지도의 발달로 점차 발품을 팔며 목적지를 선택하는 일이 줄어들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인터넷 시대 이전부터 어느 정도 이런 일이 일상화 되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참고로 아래 사진에서 위 건물은 병원, 아래 건물은 변호사 사무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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